3.1일절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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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역복지팀
조회 17,472회
작성일 09-03-0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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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정오부터 태화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민족대표 29명은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사작한다.
기독계의 3 ․ 1 운동 모의는 서울과 서북지역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 장소에 대해 논의하던 중 권동진이 ‘명월관 지점’을 제안했다.
파고다공원과 멀지 않을 뿐 아니라 서울 중심이라 모이기도 좋은 장소였다.
손병희는 그날 밤 태화관에 사람을 보내 3월 1일 모임을 예약하고 정오 이후에는
손님을 받지 말 것과 이쪽 사람이라도 명함을 제시하지 않으면 들이지 말도록 주의시켰다.
이렇게 하여 고급 요리집 태화관이 3 ․ 1 운동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식장이 된 것이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그날에 태화관은 역사적인 손님들을 맞게 되었다.
그들에게 마련된 방은 ’별유천지‘란 명칭이 붙은 구역의 ’제6호실‘이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 30매 정도가 중앙 탁자에 놓여 있었고 종업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민족대표들이 들어섰다.
한용운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협심(共同協心)하여 조선 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간단하게 연설한 후 각자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제안했다.
바로 그 무렵 파고다공원에서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태화관에 있던 한용운이 만세삼창을 제안하고 일어서서 만세를 불렀다.
그때 경무총감부에서 파견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리하여 태화관에 모였던 민족대표 29인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연행되었다.
민족대표들이 택시7대에 나누어 타고 필동에 있던 경무총감부로 떠난 후
태화관은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예전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거리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민중의 만세소리로 가득차고 있었다.
이 두 시간의 사건으로 ‘태화관’은 역사의 현장으로 민족사 속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태화여자관으로 부터 시작된 태화복지재단의 시작은
지금의 은평복지관이 있을 수 있는 중심이 되었다.
3.1운동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역사적인 자리에서 시작된 태화는
사회에서 중추적인 복지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사회에서 "태화"의 정신아래 "큰 평화"를 이루어 복지사회를 구현하도록
정진하는 감리회 태화복지재단 은평종합사회복지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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